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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국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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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은 진실이다
라고 말한 김춘수의 문장처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써 내려간 느낌들에 대한 묘사는 나의 머릿속에 중국과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그림을 전율이 흐르도록 그려주었다. 이런 그의 표현력에 대해 이 책의 번역가는 송나라 휘종의 고사를 인용하여 비유하였다.
송 휘종이 궁중 화가를 뽑는 시험에서 아래와 같은 제목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다.
꽃을 밟다가 돌아오니 나의 말 발굽에 향기가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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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으로 뽑힌 그림은 말은 곧게 뻗은 길로 걸어가고 있고, 두 마리의 나비가 그 발굽에서 날아다니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꽃과 향기와 근처에 있긴 하겠지만 화폭에 직접적으로 담겨있지는 않다. 하지만 두 마리의 나비는 그 향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끌어온다.
이처럼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여행하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을 토해낸다. 그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접촉했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자신의 연구, 그리고 그곳에 서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맥락 속에서 사람들에게 끼친 생활양식을 보려고 한 그의 시선이 녹아있다. 그가 책 속에서 거듭 고백하는 내용이 있다.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자신의 육체로써 느끼는 경험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프롤로그에 그는 젊은 시절 굶주린 영혼에 추상적인 개념들을 잔뜩 채우려고 애를 쓴 적 있었지만, 자신에게 깊은 골을 남긴 경험들과 추억들은 머릿속이 아닌 손가락 끝과 살갗에 어려 있음을 이야기한다.
눈을 감고서 내가 알고 있는 나라의 풍광을 떠올려 보거나 소리를 들어보거나 냄새를 맡아 보거나 손으로 만져 보기라도 할 때면,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오기라도 한 듯 나의 몸은 기쁨에 넘쳐 흐른다. 한번은 어떤 유대인이 유대교의 랍비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있는 영적인 팔레스타인, 그러니까 죽어서 가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랍비는 손에 쥔 지팡이로 땅을 쿵 찍으며 벌컥 화를 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돌과 가시덤불과 진흙으로 된,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진짜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그렇다. 한 나라에 대하여 내가 간직한 추억도 정신적이거나 추상적인 물건이 아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몸으로 겪은 수많은 즐거움이나 쓰라림 중에서 관념적이고 수정처럼 맑은 생각들만 상기한다면 얼마나 많이 허기를 느낄 것인가. 어느 나라를 다시 맛보려고 눈을 감을라치면 나의 오감이, 아니 내 몸에서 뻗쳐 나간 다섯 촉수들이 요란을 떨며 그 나라를 덮쳐서 내게로 끌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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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그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들은 문장으로 쓰여 있지만 그것을 읽는 순간 나의 손 끝, 코 끝, 그리고 나아가 오감이 저려온다. 책에 인쇄된 그 글자들을 타고 넘어 나의 감각기관들을 간지럽힐 정도의 생생한 그의 느낌들 때문이다.
일본은 뭇 나라들의 게이샤였다. 그러자 놀란 것은 정작 흰둥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뛰어난 광경을 보고 넋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봄에 활짝 꽃을 피우는 벚나무 숲, 가을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국화, 친절하고 귀여운 여인들, 비단, 부채, 이색적인 사찰, 조각상, 그림 등 기쁨과 우아함이 넘치는 별천지였다. 일본의 진수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것은 아침 햇살 속으로 향기를 퍼뜨리는 산벚나무의 꽃입니다. 수액이 가지 끝까지 올라가고 봉오리들은 부풀어 오른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즈음이면 나무마다 속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성스러운 꽃들이 줄기에서 활짝 피어서는 벚나무 전체를 꽃으로 뒤덮을 것이다. 바로 여행 포스터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벚나무는 한 곳에 가만히 선 채 자신의 지고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마을을 두르는 어두운 곳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그 임무란 바로 꽃을 피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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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우리는 벚꽃을 우리나라와 일본 말고 다른 곳에서 본적이 있을까? 처음 그 분홍빛으로 가득한 풍경을 보았을 때 서양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특히 땅이 척박한 그리스에서 살았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동양의, 게다가 일본의 벚꽃은 얼마나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이었을까. 일본에 가서 느낀 점은 국화와 그 나라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경우가 또 있을까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궁화를 평소 즐기지도 않으며, 무궁화를 소재로 일상생활에 끌어놓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국민들이 모두 벚꽃을 좋아하며 매년 봄만 되면 벚꽃과 함께 추억을 만들고, 온갖 생활용품과 예술품에 그들의 국화가 수놓는다. 그래서 사쿠라와 우리나라의 벚꽃은 다른 것이다.
작은 가게들은 벌써 문을 열었다. 일본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그들은 태양의 리듬을 따른다.몸을 씻는 데 긴 시간을 들이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강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진한 주스를 마신다. 가짓수가 많은 절인 채소들과 큰 그릇에 담긴 쌀밥을 먹는다. 아내는 무릎을 꿇고 남편을 수발한다. 남편에게 나무 그릇에 든 여러 가지 음식들을 가져다준다. 옷 입는 것을 도와준다. 구두를 닦고 구두끈을 묶어 준다. 문을 열어 주며 깊이 머리를 숙여 조용히 경의를 표한다. 일본에서 남자는 아내의 섬김을 거만 떨지 않고 불쾌감 없이 받아들인다. 여자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남편을 섬긴다. 신을 길들이고 신과 함께 자는 여사제 같다. "일본인들의 얼굴들 말이야. 남녀를 불문하고 일본 사람들은 모두 가면처럼 웃어.가면 뒤에 무엇이 숨어 잇는지 알 수 없다네.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 죽겠네. 따뜻한 살이 보이고, 웃고 화내고 나를 모욕하는 그런 얼굴 말일세. 가면은 더 이상 보기 싫다네"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가면은 없어.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실은 얼굴도 없다네. 가면을 벗기면 아주 똑같이 생긴 가면이 나오네. 끝까지 계속 그렇다네. 인형 안에 인형이 있고, 또다시 그 안에 인형이 들어있는 일본의 인형을 꼭 닮았지. 얼굴은 없네. 얼굴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일본의 얼굴일세. 철학적인 이야기는 관두세. 날이 어두워지는군. 어서 가지" 세계에서 일본인들보다 더 정중한 사람들은 없는 것같다. 정중함을 외부로 표현하는 그들의 형식은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다. 일본인들의 유명한 웃음은 가면 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가면으로 인해 삶이 좀 더 기분 좋아지고, 인간관계가 좀 더 위엄이 있고 사랑스러워진다. 이것으로부터 나를 단련하고 자제하며, 모든 아픔을 내 속에 가두며, 나의 재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하여 가면은 서서히 얼굴이 되고, 단순히 형식이었던 것이 본질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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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잔차키스가 바라본 일본인들의 모습. 일본인의 과도한 친절, 그리고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에서 가면을 느끼었다. 그리스에서 그리스인의 기질을 가지고 살아온 그에게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더더욱 놀라운 다름이었을 것이다.
강에 둘러싸인 채 위압적인 모습으로 단단한 화강암 방파제 위에 세워진 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힘과 완고함을 나타내는 그토록 장엄한 건물은 본 적이 없었다. 일곱 개의 층들은 용수철처럼 포개져 있었고, 지붕들은 큰 불이라도 만난 듯 갑자기 위로 솟았다. 파르테논 신전의 균형 잡힌 힘을 보여주는 직선들이나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고딕식 교회 건물의 첨탑도 없었다. 여기에는 부풀어 오르는 선이 위로 솟아 있었다. 이 선은 저돌적으로 뛰어오르려는 의지 내지는 균형을 깼지만, 미처 밖으로 뻗치지 못하고 내장된 힘을 보여주었다. 호랑이가 튀어 오르기 위해 몸을 웅크리며 긴장하는 순간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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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물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 이런 그의 느낌을 묘사해주니 어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마지막 문장인 호랑이 비유때문에 마치 그 건물 앞에 선 것처럼 나도 모르고 팔뚝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정원 조성에는 또 다른 멋진 예술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핵심의 확장 혹은 외연이다. 다시 말해 작은 마음을 광대한 정원으로 만들고, 거기에 마음과 가장 어울리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기쁨, 고독, 엄격함, 감각성, 평온함 등 어떤 마음이라도 상관없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을 말하니까 그 승려는 고개를 흔들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맨 바깥의 정원부터 시작해 보죠. 둘레의 정원들이 먼저이고 다음이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 나무도 돌도 사상도 없는 지극히 훌륭항 정원입니다." "공기만 있는 겁니까?" "공기조차도 없습니다" "그런 정원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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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잔차키스의 책들을 읽다보면 한번씩 마주하게 되는 그의 기법이다. 그는 추상적인 내용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에서 아주 집결된 추상적인 내용으로 마무리해간다. 그래서 구체적인 내용에서 그려진 조각들이 모여 그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완성되므로 결국 그 추상적인 내용은 구체성을 띄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머릿속에 그릴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묘사하는 사람, 자연, 문화예술은 그에게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힘껏 빨아들이고, 뱉어낸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일본의 밝은 면과 그 밝은 가면 뒷속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같이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내가 일본을 여행하며 느꼈던 것들을 비교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나에게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일본 여행은 유홍준 교수님의 책을 읽고 간 것이어서인지 여행 중 일본의 문화유산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것은 책뿐이었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갈 틈이 별로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얼마나 반쪽자리 여행이었는가! 카잔차키스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일본에 대해 가장 깊게 보았던 시선은 그가 대화하고 바라본 일본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 어느 곳이든 가장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정신을 살찌우고, 마음을 넓혀주는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카잔차키스는 책의 말미에서 한순간이 질적으로 영원과 맞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본 기행의 중간중간에 '부동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카잔차키스도 꽤나 이 단어에 이끌렸던 것 같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자연, 사람, 문화유산, 그리고 경험에 더욱 충실할 때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느낌은 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