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배움, 조리병들의 이야기

조리병들에게서 조르바를 만나다.
새벽 4시 30분.
조리병들이 하나둘씩 뒤척이며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오늘은 매주 목요일마다 있는 특식을 만드는 날이기 때문이다. 함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은 육지에서 누릴 수 있는 복지들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특히 해군 함정에서는 음식에 더 많은 복지비용이 할당돼서 일반 사람들의 예상을 웃도는 메뉴들이 나오곤 한다.
한치물회, 초밥, 안심 스테이크(직접 절이고 일일이 굽는!), 랍스터, 갈비탕(소갈비 덩어리를 끓인!), 캘리포니아롤, 문어숙회 비빔밥, 참치 회덮밥, 칠면조 또띠아 등등....
그러나 맛있고 특별한 메뉴일수록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법. 그래서 특식이란 조리병들에게 더 이른 기상 시간과, 더 적은 쉬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피곤하고, 힘든 노동으로만 기억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조리병들과 함께하며 얻는 재미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먼저 음식을 하기 위해 조리병들은 기본적으로 노래 세팅이 중요하다. 이때 신나는 걸그룹 노래나, 빈지노 같은 힙합퍼 들의 노래가 주를 이룬다. 한번은 내 취향인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내가 제일 선임이라 그래도 바로 뭐라고 하진 않았다. 내가 후임이었다면 진작에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음악에 맞추어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음악의 리듬과 파도의 리듬에 맞춰 칼질하고 요리를 해나간다. 여기에 위트와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라디오처럼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이야기들을 듣는 재미가 정말 쏠쏠하다. 이야기 중에는 쓸모없지만, 그냥 웃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고, 때론 내 기억 속 뇌리에 남을 질문과 이야기들도 있었다. 특히 은연중에 오가는 그들의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내기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L 군의 꿈

한번은 늘 친하게 지내는 L 군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실 그냥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L 군은 집안에 질병으로 고생한 어르신분들이 있어서 늘 병원과 질병을 가까이서 보며 자라온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건강을 도와주는 음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한, 궁극적으로는 병도 치료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다. 평소에는 늘 장난기 어린 모습의 L 군이었기에, 진지하게 자신의 꿈을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한 순간, 나도 모르고 숨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진심이 나의 가슴을 조여왔다. 그리고 이 친구의 꿈이 이뤄져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응원해지고 싶어졌다.

조리병의 레시피

나는 요리를 전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리병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늘 나보다 어린 동생이고 후임이어도 요리에서는, 나를 낮추고 많이 물어보고 배워야만 했었다. 그러다 보면 요리를 가르쳐주는 방식에 따라 각자의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중 L 군은 가장 흥미로운 친구였다. 이 친구는 결코 국자 2스푼, 간장 1컵 이런 식의 계량 방식으로 설명을 해주는 경우가 없다. 대신에 아래처럼 말해주곤 했다.
"굉장히 쉽습니다. 식초를 ‘또로로로록 똑똑똑’ 만큼 넣으면 됩니다"
Plain Text
복사
처음엔 너무 충격적이었다. 무언가를 가르쳐주며 설명할 때 이런 식의 비유를 한다는 건 생각도 못 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더 놀라운 점은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리병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갸우뚱했던 나도 어느새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이런 화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배우면서, 리포트와 소논문을 써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글을 쓸 때 늘 따라야 하는 규칙과 논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써야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조리병들은 늘 나의 고정관념에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 주었다. 꾸밈없이 솔직한 조리병들의 언어와 행동들은 늘 나를 자극했고, 그런 반복 속에서 조리병들을 보며 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이다. 여기서 나오는 조르바는 실존 인물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면 카잔차키스는 자신을 '먹물'이고, 조르바를 '동물'이라고 표현한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Plain Text
복사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는 게 힘들다고 하였다. 조리병들은 나처럼 공부하고 대학에 온 친구들에게서 볼 수 없는 솔직함과 자유로움이 있었기에 마치 책에서 나온 조르바인것만 같았다. 그들은 책상에서 인생과 사회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면서 얻은 깨달음으로 가득한 친구들이었다. 그 덕분에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익숙지 않아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게 깊은 배움을 주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나에게 감각적 사유와 이성적 사색의 여정, 그리고 성장에 이르도록 하는 여행이었다.
새벽 4시 김밥을 준비하는 조리병. 음악과 함께라면 새벽에도 웃으며 김밥을 말 수 있다.
조리병 중 가장 큰 형이었던 K형을 위해 L군이 과자를 이용해 케이크를 만들었다. 상투적인 초코파이 케이크는 만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