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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수에즈 운하를 지나며

날씨
바다보다 푸른 하늘, 하늘을 그대로 삼킨 바다. 바다 한가운데서 멈추어 버린 배 아래의 바다도 숨결을 멈춘 것만 같았다.
위치
수에즈 운하
해외파병 자체가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일이다 보니 해외에서 예상치 못한 임무를 맡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파병 당시에는 리비아 내전이 일어나 교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임무가 생겼다. 그래서 인도양에서 지중해로 넘어가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지나야 했다.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연결 운하인데, 해양사와 해운업에서 큰 의미가 있다. 세계 지도 상에서 보면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한 후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굉장히 먼 항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수에즈 운하 쪽 장소의 폭은 굉장히 좁고, 북으로는 지중해, 남으로는 인도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운하를 뚫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수에즈 운하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운하이고 얕고 좁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갈 때 배는 매우 천천히 항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만들어내는 물살이 운하의 지형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거리에 비해 긴 항해 시간을 거쳐야 하지만, 그로 인해 주변의 풍경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생각에 잠길 수 있게 된다.
배의 좌현으로는 마을이, 우현으로는 사막의 건조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기는 우리의 배. 역사를 지나간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왜냐하면 사막은 아무것도 없던 과거를, 마을은 지금 사람들이 사는 현재를, 우리의 배는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는 '과연 이 항해 길 다음에는 무슨 경험이 이어질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한순간이 질적으로 영원과 맞먹을 수 있다는 말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그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운하의 길은 천천히 머릿속에 기억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더욱 자세히 남기고 싶어 잡히지 않는 공기마저 손끝에 쥐어보려 괜히 주먹을 쥐어보았다. 지금 내가 온몸으로 느끼려 하는 이 순간의 경험들이 앞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고 밤에 자기 전 오늘 느꼈던 경험과 생각 때문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떠올랐다. 그의 책 '중국, 일본 기행'에서 번역가는 송나라 휘종의 고사를 인용해서 그의 기행문을 비유한다. 중국 송 휘종이 궁중 화가를 뽑는 시험에서 아래와 같은 제목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다.
꽃을 밟다가 돌아오니 나의 말발굽에 향기가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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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으로 뽑힌 그림은 말이 곧게 뻗은 길로 걸어가고 있고, 두 마리의 나비가 그 말이 남긴 발굽을 주위로 날갯짓을 하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꽃과 향기가 근처에 있긴 하겠지만 화폭에 직접적으로 담겨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마리의 나비는 그 향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끌어온다.
이처럼 카잔차키스도 자신이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내부에서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을 토해낸다. 그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주했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자신의 연구, 그리고 그곳에 서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 맥락 속에서 사람들에게 녹아든 모습을 보려고 하는 그의 시선이 녹아있다. 그가 책 속에서 거듭 고백하는 내용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자신의 <육체>로써 느끼는 경험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굶주린 영혼에 추상적인 개념들을 잔뜩 채우려고 애를 쓴 적이 있지만, 자신에게 깊은 골을 남긴 경험들과 추억들은 머릿속이 아닌 손가락 끝과 살갗에 어려있음을 이야기한다.
눈을 감고서 내가 알고 있는 나라의 풍광을 떠올려 보거나 소리를 들어보거나 냄새를 맡아 보거나 손으로 만져 보기라도 할 때면,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오기라도 한 듯 나의 몸은 기쁨에 넘쳐흐른다. 한 번은 어떤 유대인이 유대교의 랍비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있는 영적인 팔레스타인, 그러니까 죽어서 가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랍비는 손에 쥔 지팡이로 땅을 쿵 찍으며 벌컥 화를 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돌과 가시덤불과 진흙으로 된, 우리가 모두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진짜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그렇다. 한 나라에 대하여 내가 간직한 추억도 정신적이거나 추상적인 물건이 아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몸으로 겪은 수많은 즐거움이나 쓰라림 중에서 관념적이고 수정처럼 맑은 생각들만 상기한다면 얼마나 많이 허기를 느낄 것인가. 어느 나라를 다시 맛보려고 눈을 감을라치면 나의 오감이, 아니 내 몸에서 뻗쳐 나간 다섯 촉수가 요란을 떨며 그 나라를 덮쳐서 내게로 끌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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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그가 써내려가는 이야기들은 문장으로 쓰여 있지만, 그것을 읽는 순간 그의 이야기는 나의 손끝, 코끝, 그리고 나아가 오감으로 전달되어 온다. 책에 인쇄된 그 글자들을 타고 넘어 나의 감각기관들을 간지럽힐 정도의 생생한 그의 느낌들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책 속에서 읽은 그의 여행지를 따라가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수에즈 운하를 지나서 드디어 리비아 연안까지 이동했다. 전쟁지역에 접근하다 보니 일찍부터 전투 배치 상태여서 우리도 급식을 중단하고 전투식량만을 준비했다. 배 안에 있어 바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탄 배 바로 앞에서 폭탄이 오간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만들었다. 곧 UDT 특전 사들을 주축으로 리비아 해안에 다가가 교민들은 우리 배로 승선했다.
나는 조리병이었기에 리비아 교민들까지 식사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이다 보니 우리가 만든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볼까 봐(무슬림인 경우에는 돼지고기를 안 먹음으로 그런 걸 이야기해줘야 했다.) 몇 가지 질문 사항에 대해 미리 체크했다. 교민들이 모두 탑승하고 식당으로 내려왔는데, 교민들을 보니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서로 다른 이유로 리비아에 왔고, 같은 이유로 떠나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내전으로 인한 심각한 일을 당한 건 아니어서 큰 불안감이 감돌지는 않아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어린아이들은 우리를 신기해하면서 음료수를 달라고 하기도 하고, 여인들은 우리에게 Black Tea를 달라고 하기도 해서, 내가 이전에 구매해둔 것들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보니 다양한 요구가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도착하는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른 체, 우리는 입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