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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락, 광풍제월

밀 수 없는 나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 시선은 옮겨간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누구나 새로운 자극과 사고를 원한다. 배 안에서의 반복되는 일상생활은 이내 곧 인식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을 갈망하게 하였고, 그 덕에 우연히 마음에 맞는 친구 L군과 함께 매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대화의 시간을 우리는 ‘광풍제월’이라 명했다. 조선시대의 건물들을 살피다 보면 현판에 빈번하게 적혀 있는 한자 어구가 있다. 그것은 ‘쇄락(灑落)’이라는 한자어이다. 이는 무더운 여름날에 덥고 답답한 공기로 가득 찬 허공에 물을 뿌리고 나면 느낄 수 있는 상쾌함과 시원함을 의미한다. 이 쇄락이란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황전견이라는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의 작품 때문이다.
용릉(舂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사람됨이 아주 고결(高潔)하고 가슴속이 맑고 깨끗하기가 눈비 갠 뒤의 맑은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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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의미는 용릉 땅에 살던 주돈이 선생이란 분의 인품이 매우 높고 마음이 쇄락하여 마치 비 갠 뒤의 바람과 달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시구의 마지막에 있는 광풍제월이라는 것은 '비나 눈이 갠 뒤의 바람과 달'이라는 뜻으로 마음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을 의미한다. 아주 깊고 고요한 밤, 시원하게 내린 비가 멈추고 맑은 바람이 불어올 때, 올려다본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이 떠오르는 시구이다. 밤에 배의 갑판에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본 검은 하늘과 그로 인해 더욱 밝아 보이는 맑은 달과 별자리들을 보면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성리학에 근간하여 맑은 마음을 가지는 이 쇄락의 경지를 지향하였다. 머릿속에 지배되는 딱딱하고 정체된 것들이 아닌,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가는 모습을 마치 ‘쇄락’의 상태에 있는 마음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네모난 얼음을 둥근 그릇에 담을 수 없듯이,네모남이란 고착되고 고정된 자의식과 관념을 버려야만, 그릇의 둥긂을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과 소통해 갈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얼음과 물이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실체가 가지는 ‘상태'라는 것이다. 얼음과 물이라는 관념과 마음은 둘 다 내가 가지는 실체이고, 자신의 수양 과정에 의해 변화한다. 얼음을 물로 바꿀 수 있게 치열하게 자기 수양과 검열의 과정을 거치며 그 양태가 변화하면,광풍제월로 그려지는 깨달음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뜨거운 대기와, 답답함, 그리고 회색빛 색조의 구름이 가득했던하늘이 시원한 바람과 물줄기에 쓸려 맑고 밝은 달이 떠오르는 것이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막연한 걱정 때문에 가장 무서웠던 것이 나의 사고방식이 고착화되고,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때론 힘들지만, 재밌게 배우고 익히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다고 생각했기에,이제껏 배워온 것들이 얼음이 되어버릴 듯한 걱정이 나의 머릿속을 지배했다.그래서 2년이라는 군생활 동안 나의 좌우명은 늘 ‘초심을 잃지 말자’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내 곧 기우였음이 드러났다.새롭게 만난 경험과 사람들은 그동안의 내가 얼마나 단단한 얼음이었는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게 된 순간 중 하나가 이 ‘광풍제월’의 대화시간이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매번 달랐는데,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역사상의 한 인물과 식사를 한다면?
다시 경험하고 싶은 날
나에게 특별한 허가증을 수여한다면
그중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던 대화 주제 중 하나는 '역사상의 한 인물과 식사를 한다면?'이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나에게 울림을 준 이들을 떠올리게 하였기 때문인데,반 고흐, 김홍도,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 떠올랐다. 반 고흐의 그림과 그가 쓴 편지들에서는 자연과 그림에 대한 열정,세밀하고 따뜻하게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볼 수 있었기에 그러한 시선을 같이 나누어보고 싶었다.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초기에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건 대립으로 기가 꺾이기는커녕 자연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사실 자연과 정직한 데생 화가는 하나다. 가령 버드나무를 인물 데생을 하듯 그린다면, 즉 모든 주의를 그 나무에 기울여서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이 살아 숨 쉬게 되는 경지까지 이른다면 부수적인 배경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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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에게서 자연에 대한 시선을 느꼈다면, 김홍도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의 그림을 보면 단순해 보이는 그림에서도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있고, 그 시선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김홍도의 그림은 ‘염불 서승도’란 그림인데, 동양의 인물화에서 주인공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스님의 시선과 감정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걸어온다.
우리는 앞모습을 꾸밀 수는 있어도 뒷모습은 거짓된 표정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뒷모습은 과연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꾸밀 수 없는 나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 시선은 옮겨간다.
나에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어서 L군과 대화로 이어졌고,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와의 정신적인 대화로 확장되어갔다. 광풍제월의 시간에 나눈 수많은 대화를 통해 나의 정신에 방에 모시게 된 마지막 인물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나의 일기장에 항상 자리 잡곤 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광풍제월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그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그와의 대화를 떠올려본다.